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재한 외국인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한국사]]에서 외국인이 오랜 시간 큰 집단으로 존재한 건 [[구한말]] 이후다. 물론 [[통일신라]]의 [[중동]]인 공동체나 [[고려]]의 [[중국]] [[오대십국시대|오대십국]] 귀화인, [[조선시대]] [[왜관]]의 [[일본인]] 거주 지역이 존재했지만 이들은 한정된 지역에서 공무, 상업만 담당했고 거주도 제한했기에 한국 사회 속의 공동체라고 말하긴 어렵다. 특히 [[한중일]] [[동아시아]] 세 나라는 문화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지리적으로 서로 떨어져있었던 이유로 (남[[만주]], [[황해]], [[대한해협]] 등) 일찍부터 각자의 역사적 영역이 유지되어 왔다. 그래서 고대 이후에는 집단적으로 이웃 국가로 이주하거나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. [[조선]] 초기에 [[함경도]] 일대의 [[여진족]]들이 상당수 귀화한 바 있고, [[임진왜란]] 당시 [[일본군]] 중 일부가 귀화한 사례도 있었으며, [[명나라]] 말기와 명나라 멸망 이후에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으로 이주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동화되었다. 그러므로 한국사에서 본격적인 국내 외국인 공동체는 19세기 말에 [[청나라]]에서 건너온 [[화교]]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. 아울러 [[서양]]에서 온 [[선교사]], [[일본]]에서 건너온 [[일본인]] 등도 등장했다. 수교를 맺은 외국의 외교관들도 왔다. 그러던 것이 [[일제강점기]]를 거치면서 [[한반도]]에 약 70만 명이 넘는 일본인이 살기도 했고 8만 명에 가까운 화교도 살았다. 그러나 [[태평양 전쟁]]으로 [[일본 제국]]이 패망하면서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쫓겨났다. 이들은 [[히키아게샤]]라 불리는데 일부는 [[중국]]이나 [[대한민국|한국]]에 잔류하기도 했다. 게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[[대한민국 정부|한국 정부]]는 외세에 휘둘렸던 과거 때문에 강한 [[제노포비아]]를 드러냈고, 1948년부터는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했다. 이러다보니 1950년에는 [[주한미군]]이 500명 규모의 군사고문단(KMAG)만 남고 모두 철군하면서 극소수의 외교관과 선교사, 기자 등을 제외하면 재한 외국인은 3만여 명의 화교 정도만 남게 되었다. 전후 [[한미상호방위조약]]이 체결되면서 수만 명 규모의 주한미군이 주둔하게 되었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재외 한국인은 역시 화교가 대다수였다. 당시 한국은 [[부동산]] 등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수단을 통제하여 외국인들의 활동을 제한했고 화교들도 이때 차별을 심하게 당했다. 이때문에 차별을 못 견디고 한국의 많은 화교들이 [[홍콩]], [[대만]]이나 [[미국]] 등지로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. 그러다 경제성장과 함께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[[외국인 노동자]]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농촌의 미혼 남성들의 결혼 상대로 결혼 이민자에 대한 수요도 크게 증가한다. 이에 따라 산업연수생, [[고용허가제]]등을 통해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고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결혼이민자를 불러오게 된다. 결혼이민자에 관한 통계는 [[외국계 한국인]]을 참고할 것. 2000년대 이후 귀화자의 대다수는 이들이다.[* 그 이전에는 거의 화교들이었다. 최초의 귀화자가 1957년의 화교 손일승이기도 했고.] 체류외국인 수는 해마다 증가하여 2018년 12월 기준으로 단기체류자(90일 이하)와 장기체류자(90일 이상)를 합쳐 2,367,607명이었으며, 2019년에는 250만 명을 돌파했다. 다만 2020년에는 [[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-19]]의 확산으로 체류 외국인 수가 급감해 210만 명을 기록했다. 2021년에는 197만 명까지 내려갔다가 코로나가 일단락된 2022년부터 회복세를 보이며 2023년에 다시 250만 명을 돌파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